[필리핀 정치] 두테르테와 죽음의 유령<1>Dutrete and the specter of death


문재승 | <루트아시아> 편집위원

2016년 11월 4일 7:22 오후



두테르테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다음날 경찰들을 소집해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 의무를 다하는 과정에서 1,000명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땐 내가 여러분을 지키겠습니다.”

Dutrete and the specter of death

[필리핀 정치] 두테르테와 죽음의 유령 (1)

피플파워 30년...'두테르테'라는 기묘한 현실


[루트아시아] 지금 필리핀에서는 '죽음의 유령'이 아무렇지 않게 싸돌아다니고 있다. 지난 6월 대통령으로 취임한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가 그 서막을 알렸다. 그는 공공연히 "수십 수백만 명의 마약중독자를 학살해서라도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이미 그는 '국제적 욕쟁이'이자 '무자비한 범죄와의 전쟁 지휘자'로 포장되어 세계인의 관심을 휩쓸고 있다.  필리핀의 정치인이 이같은 세계적 관심을 받는 건 가히 30년 만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파격적인 정책들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또 동아시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불러 올 것인가? 아직 예측하기엔 이르지만, 그가 주먹을 휘두르는 이유와 그 주먹이 향하는 곳부터 살펴보자.

2016년 두테르테의 대통령 선출은 필리핀 국민들이 마르코스 독재를 무너뜨린 이른바 ‘피플 파워’ 이후 꼭 30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지난 30년간 필리핀 정치는 대통령을 비롯한 중앙 및 지방의 주요 선출직위가 ‘정치 왕조’라 불리는 소수의 유력 가문들이 독점하는, 이른바 그들만의 리그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마르코스 이후 첫 민선 대통령이었던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은 (그리고 그녀의 아들인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 역시) 필리핀에서 가장 부유한 정치가문 출신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2012년 현재 필리핀 하원의원 중 70%가 정치왕조 출신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Mendoza, R, E Beja, Jr., V Venida, and D Yap II, 'An empirical analysis of political dynasties in the 15th Philippine Congress,' Working Paper No. 1, Asian Institute of Management, 2012)  

따라서 올해 2016년 대선결과를 읽는 가장 유력한 해석은 그동안의 국정운영에서 소외되어 왔던 국민들의 분노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는 분석이었다. 수백 년 전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대규모 플랜테이션(농장) 경영을 통해 민중들의 삶을 착취하던 지배계층이 미국식 선거 민주주의를 만나 화려하게 부활했고, 대중들의 삶과 괴리된 채 부패와 치부를 일삼는 정치 엘리트로 변신해 나라를 좀먹고 있다는 일반 국민들의 인식을 대변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리핀 국민들의 분노는 어떤 종류의 것인가?

나라를 덮친 가난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들끼리 헤쳐 먹는 엘리트들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에서 기인한 분노일 수도 있고 불평등이 일상화된 출구 없는 현실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필리핀 유권자들이 두테르테를 선택한 이유는 이 나라에 만연하는 값싼 죽음이 일상화된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에서 기인한다. 

우리로 치자면 백주대낮에 마을버스(지프니, Jeepney)를 타다 강도를 당하고, 길을 걸어가다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소리, 소문 없이 죽임을 당하는 현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청부살인을 할 수 있는, 삶과 죽음이 손바닥 뒤집듯이 쉬워진 현실이다.

2014년 현재, 인구 10만 명 당 살인범죄 피해자 비율은 필리핀이 9.9명으로, 전 세계 평균인 5.3명의 두 배에 이르고 러시아(9.5명)및 우간다(11.8명)와 비슷한 수준이다.(UN Office on Drugs and Crime's International Homicide Statistics) 오랫동안 필리핀의 심각한 치안문제였으며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원인이었다. 

이에 더해 더 이상 값싼 죽음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중산층의 존재가 최근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2010년부터 6년간 필리핀을 이끌었던 아키노 정부는 필리핀의 중산층이 1970년대 이후 아키노 정권아래서 가장 빠른 수준으로 증가해 왔다고 밝힌 바 있다. (The Philippine Star, “SPECIAL REPORT: Middle class reaping fruits of fast-growing economy, 2016.2.1) 안정된 삶을 바라며 죽음에 대한 위협을 더 심각하게 느끼는 중산층이 지극히 위험스런 현실을 좌시하지 않게 된 것이다. 

결연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범죄자들을 쓸어버리겠다고 공언하는 두테르테에 열광하는 국민들을 이해하는 방향도 이 같은 필리핀의 비참한 현실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단순히 필리핀에서 마약과 마약상이 국민들의 일상을 좀먹고, 나아가 정치엘리트들에게 부패한 돈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국민들은 일련의 캠페인을 통해 두테르테가 그동안 전혀 기능하지 못했던 공권력을 재확립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합법적 폭력기능을 갖고 있는 경찰이 그동안 놀라울 정도로 무기력했고, 심지어 범법자들과 한패가 되어 국민들의 뒤통수를 쳐온 것은 필리핀에서 수많은 값싼 죽음을 양산해 온 주요 원인이었던 만큼, 극도로 위협적인 현실에 죽음으로 맞불을 놓는 두테르테에게 끌릴 법한 일이다.

두테르테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다음날 경찰들을 소집해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 의무를 다하는 과정에서 1,000명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땐 내가 여러분을 지키겠습니다.” (The Economist, “Talk Duterte to me” 2016.7.9) 어쩌면, 자신들보다 더 좋은 무기와 돈을 가진 범죄자들과 상대하던 경찰들도 죽음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을 수도 있다. 일반인이든 경찰이든 가릴 것 없이 필리핀 사람들에게 팽배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두테르테가 해소해 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국민들은 죽음의 유령이 판치는 나라에서 드디어 '목숨을 내놓은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고 생각했다. 범죄와의 전쟁뿐만이 아니다. 그는 국제무대에서도 이와 같은  각오로 임하는 것 같다. “죽을 각오를 하고 필리핀 영토에 국기를 꼽으러 제트스키를 타겠다” (The Economist, “Talk Duterte to me” 2016.7.9)고 말하는 그에게 대중들은 신뢰와 지지 보내기 시작했다.

취임 반 년도 안된 햇병아리 두테르테 정권의 앞날을 두고 벌쩌부터 여러 가지 예측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집권 초기의 좌충우돌식 행보를 자제하는 모습이 간간히 엿보이기도 한다. 신의 계시로 더 이상 욕을 하지 않겠다고 나선 그가, 예측 불가능한 언행을 자제하고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해나갈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필리핀 국민들이 두테르테의 팔뚝과 카리스마에서 "독재자 마르코스"를 떠올렸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지 모른다. 필리핀 국민들은 그동안 마르코스의 경험을 되살려 똑똑하고 멀쩡한 사람들을 대통령으로 뽑아왔지만 현실은 제자리걸음이었다. 그 때문인지 오늘날 필리핀 국민들은 '법과 원칙을 넘어서는 공고한 권위주의와 무자비한 단호함만이 필리핀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음이 자연스럽게 퍼져나갔다. 

그렇다면 이 정권의 종말도 예측하기 쉽다. 두테르테가 휘두르는 주먹의 방향이 온갖 종류의 범죄자들로부터 지난 30년간 나라를 우려먹던 기득권 엘리트들에게로 옮겨가는 순간, 정권의 험난한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초사법적 반인권적 살인 자행을 이유로, 그리고 법과 원칙을 회복한다는 이유로, 기성 엘리트세력은 필리핀의 오랜 전통인 ‘피플파워’ 카드를 만지작거릴 것이다. (계속)


[두테르테의 출마 당시 비전]

"내게 10년의 시간을 달라 ! 부패를 척결하겠다"



문재승 | 루트아시아 편집위원

2016년 11월 5일

from Seoul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