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장 ] 네팔 지진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성 상 원 | 국제문제 전문 라이터 1) |

2016년 6월 12일 6:36 오후



500년이 넘는 사원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그 일대의 구시가 상당수가 무너졌을 때 가장 멀쩡했던 곳은 꾸마리 가르, 꾸마리들의 집이었다. 탈레주 여신의 화신으로 초경 전의 여아들을 꾸마리라는 살아 있는 신으로 모시는 풍습에 대해 많은 논란들이 있다.

2015년 4월 25일 오전 12시 경 리히터규모 7.8의 강진이 네팔을 덮쳤다. 이 지진은 1934년 네팔-비하르 지진 이후 네팔에서 일어난 가장 강력한 지진이다. 이 충격으로 네팔, 중국,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8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트만두 계곡의 더르바르 광장과 같은 여러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파괴된 것은 물론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에베레스트 산에도 눈사태가 발생해 적지 않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참사 직후부터 지금까지 꽤 많은 매체에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것은 한국에 귀국하고 나서야 알았다. 지진의참사라는 스펙타클은 전달되었으나 그 참사의 이면,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고 있고, 그 참사를 어떻게 극복하려고 하고 있으며, 어떠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은 적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이야기들을 해보려고 한다. 


선입견의 네팔, 실제의 네팔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Kathmandu)는 카트만두 분지 내에 있는 3개의 도시 중 한 곳이다. 오래된 건물들이 유독 많았던 박타뿌르(Bhaktapur), 랄릿뿌르(Lalitpur), 그리고 카트만두(Kathmandu). 이 세 도시의 인구 합계는 대략 250만에서 300만 정도로 추산한다. 2011년에 인구센서스가 진행되었으나 전수조사는 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전체 인구는 약 3천만인데 이 중에서 10%가 해외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센서스도 전수조사를 하지 못하는 나라다 보니 네팔에서 대부분의 숫자들은 추정치들이다.

불과 10년전만 하더라도, 내전이 끝난 2006년의 카트만두 분지의 인구는 75만에서 100만 사이로 추정하고 있었다. 토지는 수요가 늘어나도 공급을 늘릴 수 없는 자산, 결국 버블이 엄청나게 생길 수 밖에 없었다. 2010년 부동산 버블이 터진 이후 토지 가격이 상당히 하락했음에도 시내 중심가인 푸탈리사닥의 31평방미터(약 9.6평) 토지 거래가는 2만8천 달러로 한화 3천만 원이 넘는다. 지방의 농지 가격도 높다. 농지 3.3평방미터(1평)의 거래 가격은 한화로 1만 원을 넘어가는 곳이 대부분이다. 이는 전체 인구의 10%가 해외에서 벌어온 돈이 가장 먼저 들어가는 곳이 토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동산 가격 대비 인프라 구축 수준은 아주 낮다. 수도인 카트만두도 아직 상수도는 물론 하수도 설비가 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의 집들은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올려 간단한 정수시설을 이용해 정수한 후에 쓰고 있다. 1970년대의 서울처럼 마을 우물을 쓰는 집들도 많다. 문제는 이 역시 유량변화가 계절에 따라 아주 심하다. 여름에는 비교적 풍부하다고 할 수 있지만 겨울에는 물 5리터로 세수와 양치, 그리고 화장실 뒤처리까지 해야 하는 날들이 며칠 씩 이어진다. 

더불어 네팔에선 정전이 일상이다. 철도가 인도 국경 도시의 약 30km 내외를 제외하곤 전무하고 해발 4000미터 정도의 산은 ‘언덕’이라고, 해발 6000m 정도는 봉우리라고 부르는 나라가 네팔이다. 석탄 광산도 없고 발전소를 가동할만한 평야에 흐르는 대규모 물이 없으니 석탄화력발전소를 가동할 수 없다. 원자력 발전소 역시 마찬가지.

따라서 사용하는 전기량의 95~98%는 소수력 발전으로 얻는다. 네팔의 첨두부하는 약 1200MWh에 달하지만 실제로 공급은 못하고 계획정전을 통해 전기수요를 처리하고 있다. 지진 전까지 가동했던 용량은 대략 800MW 규모로 한국과 비교하자면 석탄 화력발전소 2기에 못 미친다. 수력 발전으로 전기를 얻고 있기 때문에 계절간 편차도 심하다. 건기인 겨울에는 최대 10시간, 우기에는 최대 4시간가량 정전되고 이 정전 시간표는 네팔전력청(Nepal Elecricty Authority)에서 유량 변화에 따라 발표한다.

그나마 이렇게 제한된 인프라를 이용할 수 있는 이들도 도시인들이다. 대부분의 피해자가 발생한 산간지역은 마을 하나가 우물 하나를 이용한다. 전기공급량도 수도인 카트만두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산간지역에 집중된 피해 이런 마을들은 통신을 위한 기지국을 통신사와 협의해서 세우던가, 아니면 지역단위에서 만들어진 자치 통신사를 별도로 구성해서 이용한다. 한국의 농촌지역에서 좀 떨어진 지역의 경우엔 자비로 전봇대를 세워서 전기와 인터넷 연결을 해야 하는 것과 비슷한데, 비용은 훨씬 더 많이 들어간다.

계획정전 시간 동안에는 이런 기지국도 전기가 끊어지기 때문에 그 시간만큼은 마을에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디젤 발전기를 돌려 항상 휴대전화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나마 이런 기지국들이 있었기 때문에 산간지역의 피해 상황들이 전달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산간지역들은 사실 한국의 과거와 비교하자면 일종의 화전민 마을들에 가깝다. 많은 외신들에서 지진의 규모에 비해 인명피해가 컸던 이유가 내진설계가 되지 않은 건물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는 현지 상황을 전혀 모른 상태에서 한 이야기들이었다.

1차 지진의 진앙이었던 고르카 지역의 한 마을이다. 언덕 중턱에 한 두 채의 집들이 있고 그 사이에 산사태가 난 것을 볼 수 있다. 초대형 인명피해가 난 곳들은 대체로 저런 산사태가 마을을 덮쳐서 발생했다. 지진이 난지 석 달이 지난 7월 30일에도 이런 형태의 산사태로 인해 30여명이 포카라 인근 지역에서 목숨을 잃었다. 건물의 내진설계가 문제가 아니라 생활환경 자체가 취약해서 피해가 컸던 것이다. 반면 수도권의 아파트를 제외한 대형 건축물 대부분은 30년 전의 인도 건축설계 기준에 따라 내진설계가 되어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생긴 대형 복합쇼핑 공간들 대부분이 외관으론 심각해 보이는 손상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던 것도 내진설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저개발국가, 가난한 국가로 분류되는 국가들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의 선입견이 이런 내용들이 전달되지 않았던 원인이었던 것 같다. 지진 직후 네팔인들이 외부의 시선에 분노했던 것도 자신들이 가난하고 정부가 부패했어도 아이티 수준은 아닌데 계속 아이티와 비교되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피해, 그리고 불균형

7년 쯤 전에 배낭여행으로 카트만두를 찾았던 모 매체의 기자

는 자신이 찾았던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감상을 쏟아냈다. 실제 경천동지할 변화가 있었던 국가들에 비하면 달라진 것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사는 사람들은 그 변화를 체감하지만, 외부의 눈은 그렇지 않은 법. 정말 쉽게 안 보이는 피해는 기간 인프라에 집중되어 있다.

네팔 최초의 상수도 프로젝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멜람치(Melamchi) 물 공급 프로젝트는 카트만두에 근접한 멜람치강에서 물을 끌어들여 카트만두 분지 외곽에서 정수장을 통해 수돗물을 공급하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해발 2천 미터인 산에 27.5 km 길이의 터널을 8㎡ 크기로 뚫는 프로젝트였는데 지진으로 꽤 타격을 받아 완공이 몇 년 뒤로 미뤄질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전기. 네팔 정부는 2017년에는 계획정전을 종료한다는 선언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진행되던 45MW 규모의 보테코시(Bhotekoshi) 수력발전소를 포함, 14개의 수력발전소, 공급용량으로는 150MW에 달하는 발전소들에 문제가 생겼다.2)

네팔의 경제가 십수 년 뒤로 후퇴했다는 평가들은 이런 인프라 개선 프로젝트들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대규모 인프라 건설의 문제는 공기가 늘어나면 그 비용이 늘어나고, 그 비용이 늘어나면 그 시설을 사용할 사람들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증가하는 연쇄반응이 일어난다. 상수도 연결공사가 끝나도 수돗물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소득분위에 따라 갈라지는 상태가 꽤 오래 갈 것이다. 

파괴된 발전소들을 재건하는 비용은 전기세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대중의 저항을 두려워하는 정치가들이 전기세 인상을 주저하면 이는 네팔 전력청의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네팔인들이 스스로 이야기하는 네팔의 가장 큰 자원은 수력발전 잠재력이다. 네팔인들은 20GWh~45GWh 수준의 잠재발전용량이 있다고 이야기 하지만 토지 수용문제 등으로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낮다. 네팔전력청이 담당하고 있는 발전용량의 절반을 민간발전사업자(Indipendent Power Provider, IPP)가 공급하고 있는데 네팔전력청의 이 문제 때문에 해외투자자들이 적극적이지 않다. 자체적으로 조달할 자본 역시 없고. 그러니 늘어나는 수요를 공급이 따라 잡는 시점은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가난한 부족 '따망'의 예

산이 높은 나라인 만큼 오랜 세월동안 고유한 문화를 가진 부족(Ethnic group)들이 많은 나라가 네팔이다. 인구의 80% 정도가 힌두, 나머지 10%가 불교도들인데, 이들 불교도들은 다시 독자적인 문화와 독립된 언어를 가진 백 수십여 부족으로 나뉜다. 우리가 아는 영국의 구르카 연대에 입대하는 이들은 대부분 구릉(Gurung)으로 한국의 남방계와 비슷한 얼굴이다. 이런 소수부족들 중에 하나가 따망(Tamang)인데, 2015년 7월 12일 현재까지 총 8,844명의 사망자 중에서 3,012명이 따망이었다. 이는 총 사망자 중에서 34%에 해당한다.3)

KBS의 ‘다큐멘터리 3일’의 <나마스떼 네팔, 네팔 지진구호 72시간>편에서 200여명의 기독교도들이 죽은 곳으로 한국사람들이 기억하는 신두팔촉군에서만 1,385명의 따망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이들이 가난한 네팔에서도 가장 가난한 부족들이라 가장 척박한 땅에 터를 잡고 살고 있고, 그 터가 산사태에 가장 취약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네팔 내무부가 7월 12일까지 집계했던 60만 7212채의 지진 피해건물(개인주택, 공공건물, 병원 및 학교 모두 포함)들 중에서 38만 1976채가 따망 소유였다. 다시 말하지만 지진의 피해가 컸던 것은 내진설계가 된 곳에서 살고 있지 못해서가 아니라 생활환경이 극히 취약한 이들에게 재앙이 닥쳤기 때문이다. 

원래 따망은 네팔에서도 가장 가난한 부족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지진의 피해가 집중되었고 이들에게 절실한 것은 지원금이 아니라 그들이 다시 정착할 수 있는 안전한 땅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족한 네팔에서 국가 행정력이 이런 부분들까지 신경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통신의 취약점도 복구 늦춰

4월 25일 지진 직후 몇 시간동안은 SNS가 뉴스의 유일한 생산자이자 전달자나 다름없었다. 네팔 최대의 미디어 그룹인 KMC그룹의 건물도 심각한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였으며 수실 코이랄라 수상은 반둥회의 기념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내무부가 재난 지휘에 들어가고 각 언론사들이 말 그대로 천막방송을 시작하기 전까지 현장 상황을 가장 종합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던 것은 BBC, 더 가디언, 이코노미스트 등 영국계 매체들이었다. 

전신주가 넘어져서 전력공급이 끊어진 곳이 태반이었고 전화통화는 통신사의 처리 능력을 넘어가는 수준으로 폭주하고 있었다. 거기다 네팔의 데이터 통신비용은 무척 비싸다. 한국으로 치면 2000년대 초반 수준의 인터넷 속도를 보장하는 인터넷 사용료는 한국 돈으로 1년에 17만원을 넘어가고 년 단위로만 계약해서 쓸 수 있다. 이동통신사에서 제공하는 데이터 통신도 1Gb(기가비트)당 7천원, 10G에 6만원수준으로 일반적인 네팔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요금이 아니다. 

모두가 고립된 상태에서 제한된 정보만 취합되고 있었을 때 현지 정보들을 데이터 통신망을 이용해서 취합하고 그렇게 취합된 정보들을 분석해 어디 어디가 피해를 입었으며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가를 할 수 있었던 이들이 영국계 매체만 가능했다는 것. 사실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 구조대들이 차로 실어 나를 수 있는 곳들만 들어가고 있었을 때 역시 영국의 구호단체인 옥스팜(Oxfam)은 전체 지진피해자 800만 명중 40만 명에게 몬순이 오기 전까지 긴급 구호품들을 실어나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5월 31일 이미 15만 명에게 구호품들을 전달했다.4) 

신속하고 정확한 보도는 물론 남들이 못하는 것을 영국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인도 대륙과 영국의 오랜 역사 때문이다. 인도 대륙에서 이런 재난이 발생했을 때 영국 이외엔 이렇게 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물량의 미국은 오키나와 주둔 해병대를 투입했다. 그들은 VSTOL기인 오스프리와 휴이 헬리콥터까지 갖고 와서 구난 작전에 투입했다. 그 작전 중 휴이 헬기가 추락해 8명의 해병대원이 목숨을 잃었을 때, 오바마 대통령의 추도사는 많은 네팔인들은 물론 인도인들에게도 감명을 줬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분들에게 또한 네팔의 오지에서 발견된 우리의 해병대원과 두 명의 네팔군 가족들을 위해 추모의 기도가 남아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드리고자 합니다. 그들은 그 오지에 끔찍한 지진으로 삶의 터전이 파괴된 이들을 돕기 위해 달려갔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고 있는 사명을 상징하는 이들입니다.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미국은 돕습니다.”5) 


선진국 구호단체에 대한 오해 

그러나 국가들 간 경제력에 따른 시각 차이는 이러한 도움이 오고가는 현장에도 논쟁거리를 발생시킨다. 외국구호단체의 운영비 논쟁이 대표적이다. 구호가 필요한 현지까지 도달하는데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지칭하는 이 비용, 간접비(Overhead cost)에 대해선 몇 가지 심각한 문화적 차이, 구매력의 차이에 따른 오해 때문에 발생한 것이 대부분인데, 이해관계까지 개입되어 혼란을 빚어내기도 했다. 

해외구조대가 카트만두에서 본부를 차렸던 곳은 대부분 4성급 이상인 호텔들이었다. 재난 현장에서 이런 호텔들에 이들이 묵는 이유가 있다. 재난 현장에 투입되는 장비들을 충전시킬 전기가 충분히 공급되는 곳, 본국과 안정적인 통신이 가능한 최소한의 스피드가 보장된 인터넷, 회의와 사무가 가능한 업무공간을 재난 현장에서 확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급호텔들은 이런 시설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재난이 발생되면 이 호텔들 역시 대규모 예약 취소 사태를 맞이해야 한다. 그러니 객실을 놀리느니 국제구호 혹은 파견나온 국가의 구조대원들에게 헐값에 제공하는 것이 훨씬 낫다. 무엇보다 카트만두 특급호텔들은 그닥 비싸지 않다. 딜럭스룸 가격은 관광시즌에도 1박에 20만 원대로 3명이서 한 방을 쓰면 일인당 7만 원 이하에 쓸 수 있다. 구호단체들이 묵었던 가격은 이 절반 수준이었다.

다만 워낙 가난한 나라에선 이 할인가격 조차도 어마어마한 경비를 지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있었다. 일박에 5만원만 하더라도 네팔 대졸 초임 월급의 1/3에 달하니까. 하지만 모든 것이 네팔에서 원래 가능했다고 주장하면서 간접비(Overhead cost)만 높은 외국단체들은 모두 출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계로 가면 뭔가 다른 동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봐야 한다. 

절망한 자, 일어서려는 자, 돈 벌려는 자 

지진 직후부터 라디오 방송의 시민참여 코너에는 “나는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는 누구로 어떤 장비, 혹은 어떤 기술이 있으니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내 전화번호로 연락달라”는 참여가 이어졌다. 네팔 전체 인구의 80%는 힌두, 그들에게 힌두사원은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치는 곳이다. 네팔 청년들이 가장 먼저 참여했던 것도 사원의 철거였다. 

19세기에 만들어진 트리푸레솔의 칼모찬 가트에 청년들이 모여들어 다시 쓸 수 있는 벽돌과 못 쓰는 벽돌, 나무 구조물들을 분리했다. 무너진 유적지에선 흔히 볼 수 있었던 광경이다. 이들의 상당수는 각 정당의 청년당원들로 지진 전까지만 하더라도 심심찮게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고 하던 이들이었다.

2006년 4월 왕정이 무너지기 전까지 10여년을 끌었던 내전을 겪었던 나라에서 지지정당이 다르다는 것은 일반적인 공화정에서 볼 수 있는 적대적인 관계보다 훨씬 더 적대적이었다는 것을 알면 이들의 협력은 여러 가지 면에서 놀라웠다. 

재난현장에서 숭고한 인간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설 레미제라블의 테나르디에 부부(Thenardiers)와 같이 모두가 슬퍼하는 현장에서도 이익을 보려던 이들도 많았다. 꽤 많은 지역의 유지들은 자신의 지역에서 피해자들을 부풀려 정부의 지원금을 착복하는 사기를 쳤다. 세계식량계획(WFP)에서 지원하는 쌀들을 먹을 수 없는 쌀로 바꿔치기한 이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많은 피해자를 양산시킨 이들은 구호물자로 위장해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자들을 밀수하려고 했던 이들이다. 예를 들어 민영통신사인 NCELL은 기지국 전자장비들을 구호물자로 위장해 밀수하려다가 발각되었다. 이들의 행각이 드러난 이후 평소에도 길었던 무관세 처리 절차는 한정 없이 길어졌다. 세계 각국에서 보낸 구호물자들을 각국의 대사관에서 찾으려고 해도 열흘 이상이 걸렸을 정도였다. 

복구사업에 뛰어들었던 사업가들에게 최대의 적은 자신들이 공급하려는 물자를 공짜로 뿌리는 NGO들이었다. 제조업이 거의 없다시피 한 나라에서 자체 생산하는 물품들이 손가락으로 꼽는 와중에, 물류능력도 바닥수준이라 산악 지역에 행군해 들어가 구조물자를 전달하는 판국에 해외구조대, 해외 NGO들은 간접비용 (Overhead cost)만 높다고,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배경에는 돈의 문제가 걸려있었다. 여기에 놀아난 국내매체들도 꽤 된다.


네팔 마오이스트의 무능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정치권에 대한 네팔 국민들의 불신은 하늘에 닿기 시작했다. 지진 초기에 내무부로 일원화해서 가동하던 재난 대응이 원래 담당 부처로 이관되면서 정부가 발표하는 각종 구호대책들은 아이디어 수준에서 나오는 것들도 많았다. 2008년 1차 제헌의회는 토지개혁을 외쳤던 네팔 마오이스트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이들이 헌법제정에 실패하고 다시 2차 제헌의회가 구성이 되면서 정권은 네팔 국민회의(Nepalese Congress)와 마르크스-레닌주의 통합 공산당(United Marx Lenin Party) 연합정부가 차지했다. 애당초 복잡한 이해관계가 작동하는 연합정권이 대규모 재난상황에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자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지지부진하던 헌법제정과정은 속도를 얻기 시작했고 지난 7월에 초안이 만들어졌다. 2015년 9월 신헌법 국민투표 일정에 주요 정당들이 동의해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 같았으나 네팔 남부의 떠라이 지역을 지역근거지로 잡은 떠라이 정당들이 반대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요구는 연방으로 나눌 때 자신들도 별도의 주로 나눠달라는 것. 2006년 왕정이 무너진 이후부터 분리된 국가로 인정해달라던 이들은 심심찮게 국경을 막고 모든 물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통제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했었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과격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8월 11일엔 차를 불태우던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발포하면서 시위대 2명이 사망했다. 정상적인 헌법체제를 가진 공화국을 만들려는 네팔인들의 여정은 아직도 험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카트만두 분지 내에 있는 세 도시의 중심지는 덜발 광장이다. 이 광장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원들이 무너져 내렸다. 500년이 넘는 사원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그 일대의 구시가 상당수가 무너졌을 때 가장 멀쩡했던 곳은 꾸마리 가르, 꾸마리들의 집이었다. 탈레주 여신의 화신으로 초경 전의 여아들을 꾸마리라는 살아 있는 신으로 모시는 풍습에 대해 많은 논란들이 있다. 

하지만 외부의 논란과는 별도로 네팔인들에게 멀쩡한 꾸마리 가르는 여신의 권능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내전의 상흔이 봉합되지 못한 나라에 재앙이 터졌을 때,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찾아나서는 것은 자신들이 의지할 무엇일 수밖에 없다. 꾸마리에 대한 논쟁의 핵심은 이게 아동학대라는 것. 그러나 이 논쟁이 복구기간이 한 없이 늘어나면서 의지할 것을 찾을 수밖에 없는 네팔인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벌어지는 것 인지는 알 수 없다.


곁에서 본 한국 정부의 대응

4월 28일 대한민국 119 구조대가 도착한 현장에서 이들을 맞이하던 최용진 대사다. 기자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때 즈음엔 대사 이하 모든 주네팔 대한민국 대사관 소속 직원들도 다른 네팔 체류 한국인들처럼 집 앞 공터에서 노숙 중이었다. 

이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지진이 난지 1주일 후, 안전진단결과를 받아보고 나서였다. 이 안전진단은 대사관의 주선으로 진행되었으며 네팔에 살던 한국인들 모두 우선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교민들끼리 보는 카톡 대화방을 통해 매일 매일의 상황들이 공유되고 있었다. 국토부를 중심으로 꾸려졌던 국내 대응팀도 세월호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움직였다.

험한 지역에서 일한 경험이 많아서 재난 책을 쓴 적도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일반 행정 직원들인 대사관 직원들의 대응은 이게 한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모두가 이재민인 상황에서, 그리고 직항 편은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상황에서, 재난 상황에서 이익을 보겠다고 덤벼들던 이들 덕택에 안 그래도 한정 없이 긴 행정처리 과정이 정말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된상황에서 대사님 이하 정규직 다섯 명과 현지채용인력 몇이 뭘얼마나 할 수 있겠는가? 

일부 국가들은 이런 재난 상황이 발생한 지역에 자국민이 있으면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전문가 그룹이 상시적으로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형태의 조직을 바랄수 없다는 것은 메르스(MERs) 대응과정에서 이미 목격했다. 경비절감이 우선시되면서 있던 음압실도 닫아놨던 판에 매뉴얼에 따라 조직이 움직이지 못한다고 비판해봐야 무너진 시스템을 가동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실무자들만 욕먹는다.

이론(理論)과 다른 실전(實戰)

기본적으로 재난 상황은 일반 행정직들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미국이 연방재난청(FEMA)라는 별도의 기구를 갖추고 있는 이유는 민방위본부 하나로 어떻게 버텨보는 우리의 방식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같은 수직적 거대 조직이 막상 재난이 발생하고 보면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형 재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이론적으로는 재난전문가들이 결정권을 행사하고 현지에 익숙한 이들은 그들을 지원하는 형태로 전환하는 형태가 된다고 하더라도 네팔과 같은 저개발 국가에선 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 원래 몇 대 없는 헬기를 빨리 배정하지 못한다고 욕해봐야 소용없다. 한국에서 헬기를 몇 대 공수했으면 몰라도. 

대응에 허점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비판이 가해지는 지점들을 놓고 보면 현지의 상황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비난들은 사실 더 나은 대응을 만들어내는데 도움이 안 된다. 많은 이들은 네팔 지진이 이미 몇 년 전에 발생했던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뭐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사고가 터지는 나라에서 그렇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재난은 어디든 벌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현장에 한국인이 방치될 가능성은 사실 아주 크다. 한국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지역은 진짜 오지중의 오지이기 때문이다.

진짜 오지에 있는 사람들이야 워낙 경험이 많으니 어지간한 일이 터져도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크지만 오지 경험이 없는 이들이 외국에서 대형 재난 상황을 겪게 되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아주 낮아진다. 지진 이후 벌어진 모든 일들을 기록한 백서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두서없는 이 글도 그렇게 읽혀지길 바란다.


(2015년 10월 작성)


각주

    1) 딴지일보에 Samuel Seong으로 1999년부터 국제문제 기고. 2009년
    부터 2015년까지 네팔과 스리랑카에서 신재생에너지 프로젝트 개발 진행.
    1970년대 수산개발공사 해외기지개발 담당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스페인
    과 멕시코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2006년부터 인도대륙과의 인연이
    깊어 2014년엔 네팔 미인과 결혼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