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니] 자카르타배트맨 , 수라바야 철녀, 반둥의디자이너 인도네시아 구할까? ( 1 )


김 정 호 | 在인도네시아 사업가 1) |

2016년 5월 30일 10:24 오전



인도네시아에서 비즈니스를 해온 지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나라에서 제조업체를 운영한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공장 일에 쏟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의 대부분이 하고 있는 사업으로 채워지다 보니 그 틀을 벗어나는 만남과 경험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일천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필자와 같은 이방인의 시각으로 이 거대한 나라에 대해서 무엇을 논한다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다. 한반도의 9배에 달하는 영토를 가진 인구 세계 4위의 대국 인도네시아는 다양성의 씨줄과 날줄이 촘촘히 엮여 있는 곳이다. 이렇게 다양한 컬러를 가진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가려면 비즈니스, 여행 또는 음식, 역사나 문화에 대한 주제를 고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외국인들이 가장 관심이 덜한 인도네시아 국내 정치를 토픽으로 선택했다.

정치인을 살펴봐야 하는 이유

하필 왜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할 주제를 택했냐고 물어본다면 한동안 한국에서 자주 언급되었던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Jose Mujica) 전 대통령을 예로 설명하고 싶다.

이 동화 속 주인공 같은 남미 정치인의 이야기가 회자되면서 월드컵이 아니면 우리 관심사 밖 이었을 우루과이의 정치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올라갔다. 무히카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우루과이 국내 정치에 대해 우리가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졌을 이유가 있었을까? 무히카 대통령을 통해서 우루과이가 당면한 사회 및 정치적 이슈는 무엇인지, 더 나가서는 남미의 정치 지형은 어떠한지 좀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렇듯 정치는 한 사회를 들여다보는데 매우 유용한 창이다. 이 나라의 속살을 엿보는데도 정치라는 스펙트럼을 이용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볼 때는 매일같이 화산이 폭발하고, 비행기가 추락하고,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가는 나라에 불과하겠지만 이 사회에도 정치적 역동성이 존재한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에 소수이기는 하지만 개혁적 성향의 정치인들이 속속 주요 지자체장에 선출되면서 기득권 세력들의 독무대였던 정치권에 의미 있는 변화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리고자 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 동네에도 박원순 시장, 이재명 시장, 안희정 지사 같은 사람들이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 와중에 많은 음해와 정치적 압박에 시달리는 점도 비슷하다. 한국 보다는 시민사회의 성장이 상대적으로 더뎌서 정치적 지원세력이 극히 부족한 가운데 시민들의 지지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점도 흡사하다.

흥미롭게도 인도네시아의 차세대 정치인들은 주요 도시의 시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1위 도시 자카르타 Jakarta,2위 도시 수라바야 Surabaya,3위 도시 반둥 Bandung을 이끄는 민선시장을 다뤄보겠다. 그들이 펼쳐가는 시정은 견고하기 이를데 없는 인도네시아의 정치지형에 만만찮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청년층과 많은 지식인들이 그들에게 열광하고 있다. 기득권층의 저항에 맞서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그들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미래를 가늠해 볼수 있게 된다.


아혹 Ahok 혹은 종만학 鍾萬學

지금 인도네시아 국내 정치에서 가장 핫한 인물은 메트로폴리탄 자카르타 주지사인 아혹 Ahok을 꼽는데 이견이 없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아혹이라는 이름이 흔치 않은데 그것은 중국계 이름이기 때문이다. 본명은 바수끼 짜하야 뿌르나마 Basuki Cahaya Purnama로 중국식 이름은 종만학 鍾萬學이다. 그의 가족은 중국식 아명인 아혹 Ahok 阿學으로 불렀는데 인도네시아 식 이름보다는 이아명으로 더 자주 불리운다.

세계 4위의 인구 대국인 인도네시아에서 불과 1.2%에 불과한 중국계는 완전 정착한지 백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정책적인 차별에 시달려왔다. 특히 독재자 수하르토 Suharto 대통령 시절에는 중국계에 대한 강제 동화정책이 실행되어 한자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고, 화인(華人)을 위한 학교와 미디어도 다 문을 닫아야만 했다. 화인 특유의 단합으로 경제 영역에서 만큼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정치계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아니 아예 정계 진출을 꿈도 꾸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도 자카르타를 지키는 배트맨

인도네시아의 중국계에게는 아직도 여전히 상흔으로 남아있는 ‘1998년 5월 폭동’은 아혹의 가족도 비껴가지 않았다. 동남아시아를 휩쓸었던 경제위기로촉발된 사흘간의 폭동은 자카르타와 그 일원에서 발생했다. 위기감에 사로잡힌 정권은 의도적으로 인도네시아의 돈을 다 갖고 있는 중국계가 경제 위기의 배후라는 식의 루머를 퍼뜨렸고 이는 군중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광기가 폭도들을 사로잡으면서 중국계들에 대한 대규모 강간과 린치로 이어졌다. 폭동의 결과로 철권통치자였던 수하르토 대통령이 하야하고 본격적인 민주화가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중국계 주지사 배출은 역설적으로 중국계가 큰 희생을 치렀던 ‘1998년 5월 폭동’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서구 언론으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동시에 미움을 받는 주지사(the most loved and hated governor)”라는 별명을 얻은 아혹의 정치적 야망은 수마트라에 딸린 블리뚱 Belitung 섬에서부터 싹텄다. 가족 전체가 고등학교 때 고향을 떠나 자카르타에 정착한 후, 명문 뜨리삭띠 대학 Trisakti Univ.에 진학해서 지질학을 전공하고 경영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석사를 마친 후 고향에 다시 돌아가서 시작했던 광산업은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다.

돈이 좀 벌린다 싶자 지역 공무원들이 뇌물을 요구하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왔다. 공무원들의 부패에 진절머리가 나서 사업을 다 접고 외국으로 가려던 아혹을 막은 것은 그의 아버지였다. 부패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차라리 그런 부패와 맞서 싸울 방법을 찾으라는 아버지의 충고에 정계 입문을 결심하게 된다.

2004년 지역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한젊은 아혹은 금권 선거가 만연한 풍토에서 유권자들을 직접 접촉하며 니즈를 하나하나 파악하는 선거운동으로 지역 정가에 기린아로 등장했다. 바로 다음 해에는 블리뚱 시장 선거에도 무난히 당선되었다. 지역에서 쌓은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2009년도 인도네시아 국회의원 총선거에 도전해 당선되어 중앙 정치무대에데뷔하게 되었다.

40대 초반의 국회의원 아혹이 국회에 일으킨 바람은 신선했다. 블리뚱 지역 의회 의원시절부터 아혹은 직설적인 문제 제기와 정책의 투명성으로 유명했는데 그것은 국회에 진출해서도 계속되었다. 국회의원들의 모든 의정활동 내역과 심지어는 급여까지 하나도 빼지 말고 국회 홈페이지에 공개해야 한다는 법안을 제출해서 동료 의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인도네시아 국회의원들은 중요한 의사결정을 국회보다는 유명 휴양지의 최고급 호텔에 묵으면서 하는 관행이 있다. 국회 예산의 거의 70%가 의원들의 이런 초호화판 의정활동에 쓰이는데 아혹은 여기에 제동을 건 것이다.

개혁적인 국회의원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당시 제1야당인 투쟁 민주당 PDI-P 소속으로 메트로폴리탄 자카르타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는 조꼬 위도도 Joko Widodo 후보로부터 러닝 메이트가 되어달라는 러브콜을 받게 된다. 다른 정당 소속이었지만 의기투합한 조꼬 위도도-아혹 후보는 2012년에 임기 5년의 주지사-부지사 선거에 출마한다.


예민한 이슈에 ‘정면 대결’

이 무렵 인도네시아 국회는 지자체장 선거 비용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지자체장을 선거가 아니라 정당의 의석수 별로 국회가 지명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그린다당 Partai Gerinda 소속 의원이었던 아혹은 이 법안이 통과되면 지자체장은 아무리 지역 주민의 이익에 부합하더라도 당의 입장에 반하는 정책은 결코 추진할 수 없게 된다며 반기를 든다. 자신이 속했던 그린다 당도 이 법안에 찬성하자 아예 당적을 스스로 포기해 버렸다.

이슬람계가 절대 다수인 인도네시아는 중국계이자 기독교인인 아혹에게 수도가 있는 메트로폴리탄 자카르타의 부지사 자리를 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선거 당시 상대편 후보로부터 중국계 부지사가 당선되면 ‘1998년 5월 폭동’이 재현될 수 있다는 공공연한 위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혹은 이런 협박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보란 듯이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선거 캠페인을 벌였다. 선거 결과가 발표되자 과격파인 이슬람 수호전선 FPI,Islamic Defenders Front이 주도하는 폭력시위가 벌어지기도 했으나 수도 자카르타에 새로운 개혁을 원하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취임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2014년 7월에 있었던 제3회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에 조꼬 위도도 주지사가 출마해 당선되면서 아혹은 주지사 직을 승계하게 된다. 수도를 이끄는 수장이 되면서 아혹은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컬러를 지닌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시작한다.

자카르타는 지대가 낮아서 우기가 되면 만성적인 홍수 문제에 시달린다. 도심을 흐르는 강 주변에 빈민들이 잔뜩 세운 무허가 가옥들이 배수를 방해한다고 판단한 아혹은 무허가 가옥들을 다 철거하고 강을 깊이 파는 준설작업을 계획한다. 이 와중에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결국 실행에 옮겼고 75개에 달하는 침수지역이 1년 만에 35개 지역으로 축소되면서 반대파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의 정책은 보수적인 인도네시아에서는 너무 앞서간다고 느껴질 정도로 진보적이다. 그 예로 청소년에 대한 성교육과 자카르타 특정지역을 성매매 특구로 지정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국적을 불문하고 마약 밀매자들에게 사형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사형제 반대를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마약밀반입 혐의로 사형이 확정된 외국인 죄수들을 교도소에서 직접 면회하기도 했다.

무슬림이 절대 다수인 인도네시아에서 매우 예민한 종교 문제를 건드리는 데에도 아혹은 거침이 없었다. 기독교인들의 예배 장소를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소수파 이슬람인 아흐마디야 파 the Ahmadiyah sect의 모스크를 새로 열도록하고, 일종의 주민등록증인 KTP 카드의 종교란을 없애도록 하는 등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정책들을 거침없이 추진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를 정치의 길로 이끈 것은 부패 및 관료주의의 폐해와 싸우겠다는 결심이었다. 그 일환으로 아혹은 자카르타 주 정부의 모든 행정을 인터넷에 다 공개해버렸다. 각종 인허가 과정에서 공무원들이 수수료의 일부를 뇌물로 받는 것이 당연시 되어왔는데 그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국립은행의 해당 구좌에 직접 각종 수수료를 입금하도록 했다.


기득권층엔 가시 같은 존재

교통안전과 치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혹의 정책도 과감하기 그지없다. 도로에서의 무단 쓰레기 투척, 무면허 운전, 불법주차, 오토바이 운전자 헬멧 미착용, 정거장 아닌 곳에서의 승합차 무단 정차 등을 시민들이 사진으로 찍어서 고발할 수 있도록 공식 사이트tertiblantas.com를 만들었고 교통경찰이 올라온 사진을 토대로 범칙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심지어는 우범 지역의 치안확보를 위해 경찰들이 잠복해 있다가 조폭이나 흉악범을 사살해도 좋다는 안건까지 만들어서 지지자들까지 우려하게 만들 정도였다.

인도네시아 국민은 1등, 2등, 3등으로 구분되지 않고, 다수파와 소수파로 나뉘지도 않으며 모두 정치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역설하는 정치적 이상주의자 아혹은 인도네시아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신선한 정치인이다.

한편으로 지나치게 앞서가서 정치적인 고립도 자초하고 있다. 소속한 정당이 없어서 정치적 우군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 그의 개혁적인 정책들이 얼마나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또한 과감한 개혁정책으로 인해 기득권층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반발과 저항은 거세지고 있다.

반면 불과 2년의 임기를 남긴 아혹이 재선에 성공해서 부패와의 전쟁을 계속 치르고 개혁을 완수하기를 바라는 시민들의 조직적인 지원도 갈수록 구체화되고 있다. 고담을 지배하는 악의 세력과 홀로 맞서 싸우는 배트맨을 자처하는 아혹은 진정으로 기득권층으로부터 가장 미움을 받는 동시에 의식 있는 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주지사임에 틀림없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2015년 8월 작성)



각주

    1) 필자소개 : 한국에서 대학을 졸
    업한 후 미국에서 종교철학과 국제
    정치학을 공부했다. 이후 인도네시
    아에 정착해서 제조업체를 운영하
    면서 디지털 매거진을 만들었다.
    현지 법학대학원에서 투자법도 전
    공했다. 학업과 사업 경험을 토대
    로 동남아시아에 대해 다양한 주제
    의 글쓰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