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화교의 고향을 찾아서...중국 개방의 1등 공신의 현주소는? ( 1 ) 주강삼각주


박 번 순 | 루트아시아 편집장 | 고려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초빙교수

2016년 5월 15일 5:20 오후



15세기 명나라의 정화 선단이 대항해 도중 말라카에 들렸을 때 그들은 말라카에 당인(唐人), 즉 중국인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렇게 중국인은 오래 전부터 동남아에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해외로 나간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였다.

중국의 인구는 청나라가 안정되었던 18세기에 급격히 증가해 

1850년대에는 4.3억 명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인구팽창으로 가경지가 부족해진 농민들은 땅을 찾아 이주를 했다. 

농민들은 사천, 운남으로 이주를 했고, 요령, 흑룡강 등으로 향하기도 했다. 

특히 광둥성과 푸젠성은 19세기에 가뭄과 한발이 잦아 살기가 어려웠고 

농토를 갖지 못한 농민들은 저임금을 받고 일을 해야 했다. 

이런 농민들의 좌절과 분노는 태평천국의 난에 투영되었지만 

태평천국의 난은 외세의 도움을 받은 청나라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들은 새 삶을 개척하기 위해 해외 특히 동남아로 떠났다.

1) 편집자 주: 중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은 모든 매체가 안고 있는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대략 2000년도를 기준으로 그 이전에 알고 있는 지명이나 인명 등의 고유명사는 ‘우리식(한자)’로 인식해 발음하고, 최근에 들어온 중국어는 현지 발음으로 익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한쪽으로 통일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습니다. 또한 현재 베이징 표준어 발음을 기준으로 삼다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자어는 물론 동남아에서 화교들이 쓰는 푸젠어와 하카어까지도 건드려야 하는 모순된 상황이 빚어집니다. 루트아시아 편집진은 당면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통일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섞어 쓰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우리가 중국어를 받아들이되 완전히 한자 발음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화인의 탄생과 역할

미국에서 골드러시와 노예해방으로 하와이, 중남미 등에서 노동자 수요가 늘자 중국이 상황과 결합되어 미국과 라틴아메리카로 중국인의 이민은 급증했다. 중국인들은 강제로 혹은 자발적으로 광저우나 마카오를 통해 이민을 갔다. 장래의 부귀에 유혹되거나 우격다짐으로 덫에 걸려든 젊은이들이 쿨리(편집자 주 : 苦力는 특히 중국 출신의 짐꾼 ·광부 ·인력거꾼 등 저가노동자를 가리켜서 외국인이 부르던 호칭이다)가 되어 ‘돼지우리’에 갇혀 배로 밀수출 되었다. 1854년에는 중국인을 태운 배한 척이 샌프란시스코 도착했는데 500명이 중간에 죽고 100여명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경매에 붙여져 루이지아나와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 페루의 섬들 그리고 값싼 노동력이 필요한 어느 곳에라도 노예처럼 흩어져 갔다. 2)

1850년대 샌프란시스코 화교 거주구역의 모습

동남아로 가는 이민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덜 들었다. 난징조약으로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고, 시아멘, 광저우 등이 개방되면서 동남아로 나갈 수 있는 기회 증가했다. 인도네시아, 태국, 싱가포르 등으로 이민이 급증했다. 이들 대부분은 금의환향하여 땅을 사고 가문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이

들은 모두 광둥성의 주강삼각주와 푸젠성 출신이었다. 동남아로 나간 이민들은 미주지역 이민자들보다 상황이 나았다.

식민지 당국과 협력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던 청나라 정부는 1873년 싱가포르에 영사관을 설치하여 이들을 적절히 감시하고 명예관직을 팔아 수입도 얻고 그들의 충성심도 유지하려고 했다. 20세기 들어서 동남아 화교의 역할은 변했다. 신해혁명에서 2차 대전 이후 화교들은 중국의 완전한 독립과 중국의 건설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중국에 지원했다. 뜻있는 인사들은 중국에 투자를 했고 학교를 설립했다. 싱가포르에서 중국 지원에 앞장섰던 탄카키(陳嘉庚, Tan Kah Kee)에 의하면 1939년 대일전쟁 비용이 18억 달러였는데 화교의 송금이 11억 달러였다. 송금 중 1/10은 정부에 대한 헌금이었고 나머지는 가족에 보낸 돈이었다. 송금액의 70%는 동남아 화교가, 나머지는 미주 및 기타 지역 화교가 보낸 것이었다. 3)

중국이 1970년대 말 개혁개방을 추진하자 동남아 화교들은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중국 경제는 피폐해졌고 결국 등소평 체제는 개방을 선택하지 않을 수없었다. 그렇지만 죽의 장막 속의 세계에 대해 확신을 가진 서구의 다국적기업은 없었다. 1979년 7월 광둥성의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산터우(汕頭) 그리고 푸젠성의 시아멘(厦門)이 경제특구로 지정되었다.

중국당국이 왜 이들을 경제특구로 지정했는가는 분명하다. 중국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과거와 같이 화교자본이었다. 선전은 홍콩과, 주하이는 마카오와 붙어있다. 시아멘은 대만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다. 그리고 산두(산터우)는 동남아의 가장 대표적인 화교방인 조주방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동남아의 화교기업들은 중국에서 기회를 잡기 위해 투자하기 시작했다. 선전시 외국인직접투자 승인 1호는 태국의 CP그룹이었다. 광둥성과 푸젠성에서 출발했던 화교기업의 투자는 점점 북상했다. 그러나 화교기업의 역량에 비해 중국경제의 성장은 빨랐다. 특히 1990년대 말 화교기업들은 동남아에서 외환위기를 겪으며 큰 타격을 입었다.

중국의 성장은 중국기업의 역량을 키웠고, 동북아 3국과 서구의 보다 수준 높은 기술로 무장한 기업들이 중국에 진출했다. 화교기업들은 다른 여러 다국적기업들에 밀려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고 비교우위를 잃어가고 있다. 부동산이나 호텔, 유통업에 진출한 화교기업들은 1970년대 중국이 개방을 할 때는 가장

앞선 투자자였으나 중국의 산업구조가 수출중심의 제조업으로 바뀌면서 그 역할은 점점 감소하고 있다. 중국에서 화교의 현재는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은 2015년 여름, 중국의 광둥-푸젠-상하이 화교의 고향을 찾아본 방문기이다.

주강삼각주의 이민

광둥성은 1980년대부터 중국 경제발전을 선도했다. 광둥성의 면적은 한국-남한 면적의 거의 1.8배, 인구는 2014년 현재 1억 700만 명으로 한국의 두 배이다. 1인당 소득은 2012년 8,606달러로서 중국 전체 1인당 소득에 비해서는 아주 높다. 사실 광둥성은 중국의 용광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1979년 지정된 4대 경제특구의 3개가 광둥성에 있었고 외국인직접투자의 유치로 고도성장을 했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공산당 일부에서 개혁과 개방에 회의적일 때 등소평은 선전 일대를 순행하고 개방의 지속성을 역설했다.

2010년 중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최대인구 도시는 상하이로 인구가 2천만 명 이상이다. 중국에서의 도시 개념은 한국과는 다르다. 상하이시 안에 또 여러 개의 작은 시가 소속되어 있고 면적 또한 크기 때문에 우리와 직접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10대 도시 중 4위 광저우 1064만, 5위 선전 1036만, 7위 둥관 727만, 10위 포산 677만 명 등 4개 도시가 광둥성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9위인 홍콩 706만 명을 포함하면 광둥성 지역에만 중국의 10대 도시 중 5개가 포진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광둥성은 사람 중심의 지역이다.

그런데 사람이 그냥 몰려오는 것이 아니다. 일자리가 사람을 불러 온 것인데, 바로 경제 개방과 함께 광둥성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실제 1978년 이전의 선전은 거의 유명무실한 하나의 현에 불과했지만 30년 만에 인구 천만 명의 도시가 되었고 이러한 인구의 급속한 성장은 인류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광둥성의 중심은 주강삼각주(珠江三角洲) 지역이다. 자오칭(肇慶), 포산(佛山) 쟝먼(江門), 중산(中山), 주하이(珠海), 광저우(廣州), 동관(東莞), 선전(深圳), 후이저우(惠州) 및 홍콩과 마카오지역을 포함한 일대를 주강 삼각주 지역이라고한다. 이 일대를 규정하는 강이 주강인데 길이가 2,000km 이상으로 중국에서 3위의 긴 강이다.

실제 주강은 다른 3개의 강이 광저우에서 합류하여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먼저 서(西)강은 자오칭의 시내를 관통하여 북상했다 다시 남하하여 포산의 왼쪽을 따라 흘러 다시 강문의 오른쪽을 돌아 주하이시와 마카오의 왼쪽으로 흘러 바다로 나간다. 그 다음에 북(北)강은 광둥성 북부의 소관을 관통하여 흘러내려 청원을 지나고 이 강은 포산의 남쪽으로 흐른다. 여기서부터는 서강과 접근하지만 만나지는 않고 중산의 오른쪽으로 흐른다. 서강이나 북강은 중산 쪽으로 흐르면서 수많은 지류들을 만들어 내결국 중산이나 주하이는 강으로 둘러싸인 형태가 된다. 동강은 광둥의 동부 내륙에서 흘러 하원을 지나 혜주를 관통하여 동완시 중심의 북주를 돌아 광주 남쪽의 주강으로 합류한다. 역시 주강으로 합류하기 전에 동강은 많은 지류들을 만들어 낸다.

이와 같이 여러 강이 합류하면서 주강은 광주의 남쪽에서 거대한 강폭을 만들고 이미 바다가 된다. 주강은 홍콩과 마카오 사이의 큰 바다와 연결되고 있다. 주강 삼각주 지역은 곡창지대일 뿐만 아니라 중국이 개혁개방을 한 이후 가장 빨리 성장한 지역이다. 홍콩과 마카오를 바다 어귀에 두고 있기 때문에 주강 삼각주 지역을 중국의 남대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주로 대만, 홍콩 등에서 이주한 노동집약적 경공업체들이 생산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점차 산업구조가 고도화된 지역이다.

주강 삼각주 출신의 화교들은 상대적으로 홍콩, 마카오와 미주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 지역은 광둥성의 동부, 즉 월동지역이나 푸젠성 지역에 비해 일찍부터 개항을 해 있던 광저우, 마카오, 그리고 홍콩항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동남아 보다는 상대적으로 미주, 하와이, 일본 등으로 쉽게 이주할 수 있었다.

주강삼각주 서북부에 있는 도시가 자오칭이다. 청나라는 광둥과 광서를 ‘양광’이라 했고 초기에는 자오칭에 양 지역을 총괄하는 양광총독부를 두었다. 18세기 중엽 건륭제가 총독부를 광주로 옮길 때까지 자오칭은 이 지역의 중심도시였다. 따라서 16세기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해 중국에 왔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는 마카오에서 이 자오칭으로 와서 거의 6년을 살면서 점차 중국의 내륙지방, 궁극적으로는 베이징으로 올라갔다. 베트남의 호이안과 말레이시아의 조호바루 등 동남아의 작은 도시에서는 광조회관(廣肇會館)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광주부와 자오칭부 출신들이 만든 것이다.

기차가 도착한 자오칭역은 시내 중심가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다. 자오칭의 중심가에 있는 관광지인 성호의 부근에는 화교대하가 있다. 화교대하는 호텔로 이용되고 있고, 주차장에서 자오칭-홍콩버스가 하루에 몇 대 출발한다. 광둥이나 푸젠 어느 도시에나 있는 화교대하라는 빌딩 이름은 대부분 화교자본이 투자를 하여 호텔을 세운 것이다. 개혁개방의 시대에 들어 화교들은 초기에 부동산 등에 투자를 했는데 호텔은 중요한 수단이었다. 자오칭의 화교대하는 대하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3~4층의 낡은 건물이다.

자오칭에서 마카오까지 가는 길은 포산, 강문, 중산을 모두 거치게 된다. 중국의 근대에 3명의 걸출한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출생했다. 포산 출신의 강유위(1858-1927), 중산의 손문(1866-1925), 그리고 강문 출신의 양계초(1873-1929)이다. 이들은 모두 중국의 근대화에 사상적 혹은 실천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지만 강유위와 양계초가 개혁을 통해 중국을 근대화 시킬 생각을 했으나 손문은 혁명을 통한 청나라 군주제의 붕괴를 목표로 했다. 따라서 유학에 기반한 유신을 강조한 강유위와 양계초는 서로 이견은 있었으나 동지적 입장에서 손문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이들이 국내외에서 활동할 때 모두 화교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본, 미국, 동남아, 유럽을 계속 떠돌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화교들은 돈을 거두어 이들에게 생활비를 제공했고 거처를 마련해 주었으며 군자금을 공급했다. 이들은 또한 화교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 그들이 상상하는 새로운 중국에 대해서 화교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고 그들의 애국심을 고취해야 했다.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강삼각주 출신의 화교들이 세계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손문을 낳은 고장, 중산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 손문(쑨원) 그는 주강 삼각주 출신이다

이들 중에서도 중국과 대만 양측에서 모두 국부로 기리고 있는 손문, 즉 손중산은 향산현 취형촌의 빈가에서 태어났다. 손문을 기리기 위해 지금은 중산으로 이름이 바뀐 향산은 오래전에는 주강 삼각주의 지류들에 의해 산재한 섬들 같았지만 점차 개간을 한다거나 간척을 하여 강상이나 해면은 점차 육지로 변했다.

중산은 19세기와 20세기 중국이 겪은 고통을 지켜봤다. 제 1차 아편전쟁의 많은 전투가 중산이나 주변에서 일어났다. 아편전쟁 이후 외국의 영향력은 이 지역에 더 높아졌고 중산 사람들은 외국에서 유학을 해 근대중국을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37년 7월 제 2차 중일전쟁 기간에 일본군이 중산현의 여러 섬들을 장악했고, 1940년 3월에는 중산현대부분을 장악했다. 이후 일본이 무조건 항복과 함께 물러났으나 중산은 국공 싸움의 중요한 대치점이 되었다. 그리고 1949년 10월 30일 중산에서 공산군이 마침내 국민당을 패퇴시켰다.

중산 취형촌에는 손중산 고거가 국가가 보호하는 문물로 지정되어 있다. 손문전기를 쓴 시프린에 따르면 손문은 실패만 하는 혁명가였지만 중국과 대만 양쪽에서 모두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인물이다. 손중산은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을 세운 신해혁명을 이끈 지도자였다. 그는 삼민주의를 주장했다.

그가 1925년 죽지 않고 더 오래 살아남았다면 실제 중국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다행히도 그는 일찍 죽어서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가 된 것이고 오늘날 중국과 대만이 공통으로 갖는 자산이 되었다.

중산시내는 서강의 한 지류인 석기하(石岐河)가 50미터 정도의 너비로 천천히 흐르고 있는 가운데 강변 양쪽에 강변로 를 만들어 두었다. 강변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저녁에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그럴 듯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강변에는 말레이시아의 화교 기업인 라이온(獅子)그룹의 팍슨백화점이 있는데 석조건물은 고전적 스타일에 고급석재로 지어 단아하고도 품위가 있어 보인다. 팍슨백화점은 2014년 말 현재 중국에 60개가 설립되어 있다.

동남아 어느 도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팍손Parkson 백화점

라이온그룹(獅子그룹)은 현재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 집단 중의 하나이다. 2015년 현재 회장은 탄스리 윌리암 종(Tan Sri William Cheng, 鐘廷森)이며 화교 3세로서 싱가포르에서 태어났다. 라이온 그룹을 창업한 윌리암의 조부는 광둥성 조주부의 조양 출신으로 1920년대에 싱가포르로 이민을 와서 작은 가게를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라이온 그룹의 주요 진출분야는 철강분야인데 1978년 정부의 허가를 받아 철강공장을 건설했다. 또한 일본의 스즈키 오토바이의 말레이시아 내 조립을 하고 있다. 윌리암 종은 1987년 백화점 분야에 진출해 팍슨(百盛)을 시작했다.

기존에 철강이 주요업종이었던 라이온 그룹은 이제 대외적으로 팍슨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팍슨은 1994년 베이징에 최초의 백화점을 개점했다. 중국의유통시장에서 중급 및 중고급 시장을 목표로 한 것이다. 팍슨은 외국 백화점 중에서는 중국에 가장 이른 시간에 진출한 브랜드로서 2014년 말 현재 33개 도시에 60개의 매장을 소유하고 있다.

강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보행가로 들어서면 19세기 후반부터 외국에 개방된 이후 들어선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그 중의 한 건물에는 향산상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손문은 1912년 4월 중화민국 임시총통을 사임하고 1912년 5월 전국철도총독이 된다. 철도건설이 그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그는 곧 고향을 방문하여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당시 이 자리에는 혜원의원이 있었는데 여기서 그는 중산의 상공인들을 만났고 1920년에 중산현 당국은 이 사실을 기념하여 이 자리에 향산상회 건물을 지었다.


2015년 9월 작성

---2편으로 이어집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