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태국의 왕위계승 쟁점과 전망 무엇이 문제인가?


김 홍 구 | 루트아시아 고문 | 부산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 교수

2016년 5월 13일 10:48 오전



태국에서 왕위계승의 제도화 역사는 길 지 않다. 현재 왕위계승에 관한 모법이 되고 있는 것은 1924년 왕위계승법이 다. 와치라롱껀 황태자도 이 법에 따라 후계자로 임명되었다.

푸미폰 국왕(Bhumibol Adulyadej,1927년생)이 고령에 병약해지자 차기후계자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현재 푸미폰 국왕의 후계자는 분명와치라롱껀 황태자(Vajiralongkorn,1952년생)이다. 와치라롱껀은 20세가되던 1972년 공식적으로 황태자 책봉식을 갖고 1974년 왕위 계승법에 따라 후계자로 임명되었다. 그런데도 후계자 문제가 지속적으로 거론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태국 사회의 민감 이슈

가장 중요한 이유는 황태자 개인의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푸미폰국왕 60회 생일 즈음해 “황태자는 명예롭지 못하며 도덕성이 부족하고, 그가 왕이 된다면 혼란이 국가를 집어 삼킬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왕실비난전단이 살포된 적이 있었다. 세 차례 결혼한 황태자는 여성문제가 복잡하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황태자가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에대한 회의는 오래 전부터 태국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쭐라롱껀대왕의 증손자이며, 푸미폰 국왕과는 오촌지간(푸미폰국왕의 배 다른 작은 아버지의 손자)인현재 방콕 시장 쑤쿰판(SukhumphanBoriphat, 1952년생)은 2009년 4월독일의 시사 주간지 슈피겔(Spiegel)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왕은 공식적으로 그의 후계자를 뽑지않았다” 라고 의미 심장한 발언을 한적도 있다.

또 다른 이유는 황태자뿐 아니라 둘째공주인 씨린턴 공주(Sirindhorn, 1955년생)도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1974년 헌법에서 공주를 후계자로 임명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1977년부터 계승자격을 갖추게 되었다.이후 차기 왕위를 누가 계승할 것인가가애매해지기 시작했다. 와치라롱껀 황태자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목적일 뿐, 황태자의 지위에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도 있지만 별로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2011년태국 외교부 웹사이트에서는 “와치라롱껀은 1972년에 이미 황태자 즉, 왕위계승자가 되었다고 공포되었으며, 따라서 불확실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으며,다른 추측을 할 근거도 없다”고 언급한적이 있지만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직접 당사자인 왕실에서 공식적 의견을발표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애매한 해석을 조장하고 있는 후계문제는 그 정치적 이유 때문에 더욱 뜨거운이슈가 되고 있다. 2006년 쿠데타 이후 태국정치를 상징하는 두 가지 색깔의 정치세력은 레드셔츠와 옐로셔츠이다. 전자는 2006년 쿠데타로 물러난 탁씬(Thaksin Shinawatra, 1949년생)전 총리를 지지하는 세력인데 이들은, 도시빈민과 동북부 · 북부 농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후자는 왕실, 군부, 관계, 재계, 중산층을 아우르는 보수동맹 네트워크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두 세력은 2006년 쿠데타 후 한치의 타협 없이 극단적인 정치투쟁을 벌이고 있다. 탁씬은 이 과정에서 입헌군주제를부정하고 공화제를 도입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아 왕실의 절대 비토세력으로 낙인 찍혀있다.

앞으로 레드셔츠와 옐로셔츠, 두 세력이 차기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대립될경우 태국에는 지금보다 더 큰 정치불안이 초래될 가능성이 있다. 왕위계승 1순위인 와치라롱껀 황태자는 탁씬과 친밀한 관계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탁씬은 과거에 황태자의 재정적 후견인 역할을 한 적도 있다. 그러니 반탁씬 세력들은 탁씬과 친분관계를 유지하는 황태자가 탐탁할 리 없다. 씨린턴 공주는 황태자보다 국민적 신망이 두텁고 그녀 아버지의 좋은 점을 가장 닮은 딸로 유명하며 반탁씬 세력들이 특히 선호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왕위계승의 역사적 과정

태국에서 왕위계승의 제도화 역사는 길지 않다. 현재 왕위계승에 관한 모법이되고 있는 것은 1924년 왕위계승법이다. 와치라롱껀 황태자도 이 법에 따라후계자로 임명되었다. 그 이전에는 확실하게 제도화된 계승규칙이 없어서 항상정치불안의 원인이 되었다.1456년 아윳타야 왕조(Ayutthaya,1351–1767)의 뜨라이록까낫왕(Borommatrailokkanat,1431–1488)은왕실법을 만들어 왕위계승에 준한 규칙도 처음으로 정했다. 하지만 왕실법에서는 왕의 아들들의 서열을 정했을 뿐, 후계자를 직접 정해 둔 것은 아니었다. 이법에서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부왕제를두었다는 사실이다. 왕은 부왕인 우빠랏(Uparaja)을 임명해 자신의 통치와 승계를 순조롭게 돕도록 했다. 아윳타야왕조때 부왕이 된 자는 왕자, 왕의 동생,조카 등이었다. 

33명의 왕이 있었고, 12명의 부왕이 있었는데 부왕이 된 경우는아들 8명, 동생 3명, 조카 1명이며, 부왕이 왕이 된 경우는 9명이었다. 현재 랏따나꼬씬 왕조(Rattanakosin, 1782-현재)에서는 라마 1세의 부왕을 지낸 라마 2세(Rama 2, 1809-1824)를 제외하고는 한 명도 왕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부왕제 역시 확실한 왕위계승제도라고 볼 수 는 없다.이 같은 계승방식의 불확실성 속에서 비정상적인 왕위계승의 경우가 많았다. 아윳타야 왕조때 왕위계승의 3분의 1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왕위 계승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언제나정치적 영향력을 갖는 왕족과 귀족세력들이었다. 왕과 그들의 의견은 달랐다.

왕은 일반적으로 계승규칙이 엄격하게지켜지기를 원했으나 주요 정치세력들은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우호적인 후보를 선택할 수 있도록 충분한 융통성을 갖기를 원했다.

현 왕조에서도 이런 상황은 황태자제도를 확립한 라마 5세때까지 이어졌다. 라마1세 장남이 부왕에 임명되었다가 라마 2세가 되어 승계했다. 라마 3세는 라마 2세와 후궁 사이에서 출생해 왕위에 올랐다. 후일 라마4세가 되는 몽꿋(Mongkut)왕자가 적자로서는 장남이었지만 만 20세가 안된 나이로 사원에서 승려생활 시작한지 13일밖에 안되었고 라마 3세는 37세로 모든 국정을처리하고 있었다. 주요 왕족과 귀족들은 몽꿋의 연소함, 국정 무경험으로 그를 택했다간 혼란에 빠질까봐 유능한 라마 3세를 선택했다. 당시는 영국과 버마 간 전쟁이 한창이었다. 라마 3세는그의 아들 두 명 중 한 명이 계승하기를 바랐으나 일부 왕족과 귀족의 반발을 두려워해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다.

당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인물은 프라크랑(Phra Khlang, 재무겸 외무장관)인딧 분낙 (Dit Bunnak, 1788–1855)이다. 그는 후일 분낙가의 세도정치 기초를 닦은 사람인 데 세도정치를 위해서는라마 3세의 왕자가 아닌 사람을 선택해야 했으니 그가 승려였던 라마 4세이다.라마4세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후계자를정하지 않고 총리겸 국방장관인 추엉분낙(Chuang Bunnag 또는 Sri Suriyawong)에게전권을 넘겨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라마 4세의 장자인 라마 5세를 지지하면서 섭정의 자리에 올라서 세력을 누렸다.

태국 근대화를 본격적으로 이끈 라마 5세 쭐라롱껀 왕(Chulalongkorn,1868–1910)은 부왕제를 폐지하고 유럽식 황태자제도를 창설했다. 그는 부왕과의 갈등으로 집권초기 권력기반이 약화되었으나 부왕이 사망한 후 즉시 부왕제를 폐지하는 대신에 유럽식 황태자제도를 마련해 왕의 후계자를 미리 확정시켰다. “왕이 부왕을 임명하는 것은 전혀 관습적인 것이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군주의 대권을 분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비경제적이고 쓸모 없는 직책이다”라고 부왕제를 혹평했다. 1886년 와치룬나힛(Wachirunnahit)이최초의 황태자로 임명되었으나 불행히도 8년후 사망하자 와치라웃(Vajiravudh)이 황태자에 오르니 그가 라마 6세(1910-1925)이다.


현 왕조의 바탕이 된 1924년 법

라마 5세에 의해서 실제로 최초의 황태자로 임명된 와치라웃은 1924년 왕위계승법(The Palace Law of Succession,1924)을 제정했다. 그 주요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왕은 왕실 남성 중 한 명을 새 왕으로 임명하는 절대권을 갖는다(5조). 왕은 그의 후계자를 그 직에서 해임할 절대권도 갖는다. 그렇게 되면 그의 전체 혈통은 왕권에서 배제된다(7조). 8조와 9조는 왕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죽는경우 새 왕을 결정하는 과정을 설명하고있다. 특히 9조는 승계순서에 관해 정확히 설명해 두고 있다. 모두 13개 단계로나뉘는 데 왕과 왕비 사이에 태어난 첫째 아들(왕자)→이 왕자와 그 배우자의첫째 아들→그 다음 아들들 순이며, 왕과 왕비 사이에 태어난 첫째 아들이 유고이고 아들도 없는 경우에는 둘째 아들대로 왕위가 계승된다.

10조는 왕위 계승 부적격자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왕위에 오르려는 자는 누구나 대중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그들의보호자가 돼야 한다. 다중이 혐오하는자는 왕과 국민들의 우려를 없애기 위해서 승계를 포기해야 한다. 11조는 정신이상, 심각한 범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불교의 옹호자로서 봉사할 수 없을때, 외국여자(원래 태국국적이 아닌)와 결혼한 경우는 승계라인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13조는 공주가 왕위에 오르는것은 시기상조로 간주해 절대로 금지시키고 있다.

1924년 왕위계승법의 주요 내용은 왕은후계자를 정하는 데 절대권을 갖는다는것, 남성 후계자만을 인정하며 여성 후계자는 금지시키고 있다는 것, 승계라인이 정해져 있지만, 예외 조항이 있다는점 등일 것이다.

1924년 왕위계승법이 만들어진 이후실제로 어떻게 계승되었나를 살펴보면다음과 같다. 라마5세 쭐라롱껀왕은 4명의 왕비와 32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1910-20년대 사이에 왕실혈통을 갖는3명의 왕비(正宮)와 사이에 7명의 아들이 생존해 있었다. 첫째 왕비는 5명의왕자(이들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었음), 둘째 왕비는 1명의 왕자(2명의 아들이있었음), 셋째 왕비는 1명의 왕자(2명의아들이 있었음)를 가졌다.

왕위계승법을 만든 이는 첫째 부인의 장남인 와치라웃이었다. 와치라웃이 죽고 그의 막내 동생인 라마 7세 쁘라차티뽁(Prajadhipok, 1925-1935)이 계승했다. 첫째 왕비는 모두 5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와치라웃 재위기간 중 둘째, 셋째, 넷째 왕자는 죽었다. 와치라웃은 딸이 1명 있었지만 왕위계승법에 따라 승계라인에서 배제되었다. 둘째 왕자는 러시아 여성과 사이에 아들이 한 명 있었으나 그 아들은 어머니가 외국인이었기때문에 승계라인에서 배제되었다. 넷째왕자에게도 아들이 있었지만 그 어머니가 평민이었기 때문에 계승자격이 없어 쁘라차티뽁이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쁘라차티뽁은 자식이 한 명도 없어서 결국 쭐라롱껀왕의 둘째 왕비의 장손(Mahidol Adulyadej)에게 왕위가 계승되어야 했지만 그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의 첫째 아들인 아난타 마히돈(Anada Mahidol, 1935-1946)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아난타 마히돈이 미혼으로 후사가 없이 죽자, 그의 동생인 푸미폰 아둔야뎃이 지금의 라마 9세가 되었다. 라마 5세때 황태자 임명과 6세 때인1924년 왕위계승법이 제정된 후 비교적제도화된 법 속에서 승계가 질서 있게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그 역사는 지극히 짧다고 볼 수 있다.


1974년 헌법과 2007년 헌법1932년 입헌혁명 후에도 왕위계승에 관해서는 1924년 왕위계승법을 따르도록했으나 1974년 헌법에서 공주를 후계자로 임명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헌법 25조는 “왕위 계승은 1924년 왕위계승법에 따라 진행되지만, 국회는 왕자가 없으면 공주가 계승하도록 동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2014년 5월 쿠데타로 폐기된 가장 최근의 2007년 헌법에는 국왕이 1924년 왕실법에 따라 후계자를 임명할 수 있고(22조), 왕실법에 따르지 않고 후계자를임명하는 경우에는 추밀원에서 후계자의 명단(여성도 가능)을 작성해 내각에제출한 후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며,하원 임기가 끝났거나 해산되었을 때는상원이 국회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규정돼 있다 (23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추밀원(PrivyCouncil)의 역할이다. 추밀원은 라마 5세 때인 1874년 국왕자문기구의 일종으로 만들어졌다. 1932년 입헌혁명 후 일시적으로 폐지되기도 했지만 1949년 헌법에 따라 오늘날의 형태를 갖춘 추밀원이 탄생했다. 2015년 현재 추밀원은 18명(의장 포함해 19명)으로 구성되는데대부분 주로 전직 군, 법관, 관료 출신들이다. 추밀원은 국왕에게 정치적인 자문을 하고 있으며 이들을 통해 국왕은 자신의 의중을 나타내곤 한다.2007년 헌법에 따르면 추밀원은 국왕유고 시에 섭정의 명단을 국회에 보내승인을 받거나(19조), 섭정이 유고상황에서는 추밀원 의장이 직접 임시로 섭정을 할 수 도 있다(20조). 왕실법 개정은국왕의 절대적 권한이며, 추밀원에서는국왕의 뜻에 따라 왕실법을 개정해 국왕이 검토하게 한 후 국회에 제출하면 국회가 부서하게 된다(22조).

위의 후계자 임명과 추밀원 역할에 관해서는 현재 진행 중인 2015년 헌법초안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왕실 가족과 왕위계승자격현재 왕실 가족들을 살펴보면, 푸미폰국왕은 씨리낏 왕비(Queen Sirikit,1932년생)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다. 그 중 장남과 둘째 공주 두 명이 우선적으로 후계자격을 갖추고 있지만, 그가능성을 갖고 있는 다른 후손들도 있다.



첫째 딸 우본랏(Ubonrat Ratchakanya,1951년생)은 미국인 피터 젠슨(PeterJensen) 과 결혼 해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죽었다. 그녀는 외국인과 결혼한 전력으로 아직까지 공주의 타이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딸씨린턴은 미혼이며, 1977년에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공주”가 되었다. 셋째딸 쭐라펀 (Chulabhorn Walailak,1957년생)은 두 명의 딸을 두었다.

황태자는 공식적으로 3번 결혼 해 3명의 부인으로부터 5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얻었다. 첫번째 부인(쏨싸왈리, Soamsawali, 1957년생)과의 사이에 딸 한 명(팟차라끼띠야파, Bajrakitiyabha,1978년생)을 두었는데 그딸은 순수 왕실 혈통으로 유력한 왕위계승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둘째 부인(쑤짜린니 위왓차라웡 Sujarinee Vivacharawongse,또는 유와티다 폰쁘라, Yuvadhida Polpraserth, 1962년생)과의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다. 이혼 후 이들 모두는 외국으로 추방되었으나 딸(씨리완와리나리랏, SiriwanwariNarirat, 1987년생)만은 2005년 왕실로 복귀해 왕족 지위를 점차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미루어 볼 때 4남의 경우도 왕실 복귀가능성이 있다고볼 수 있는데 이 중 장남(쭈타왓 마히돈, Juthavachara Mahidol)은 1979년생이다. 현재 아들들은 미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태자는 마지막으로 2005년 셋째 부인(씨랏 쑤와디,Srirasmi Suwadee, 1971년생)과 사이에 1남 티빵껀랏싸미촛(TipangkaraRasmichote) 을 얻었다. 

결국 1924년왕위계승법에 따르면(남성만이 가능하도록 한), 승계순위는 황태자→ 셋째 부인 아들인 티빵껀랏싸미촛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으며, 둘째 부인과 사이에낳은 4명의 아들들의 복권 여부도 변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공주도 승계가 가능하도록 한 1974년 이후 헌법을 적용하면 승계 가능 경우의 수는 더 복잡하게 된다. 근래 황태자가 티빵껀랏싸미촛왕자의 생모인 씨랏 쑤와디와 이혼함으로써 왕자의 지위가 불안정 하게 되었다는 점도 유의해 둘 필요가 있다.

왕위 계승과 향후 정국전망

일반적으로 향후 왕위 계승 1, 2 순위로여겨지는 와치라롱껀 황태자와 씨린턴공주 중 한 명이 후계자가될 것이라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각각의 경우에 따라 정국전망도 크게 달라질수 있을 것이다.

첫째, 와치라롱껀 황태자가 후계자가 되는 경우다. 엄연한 비토세력이 있긴 하지만 가장 정상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으며, 정치적 파장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근래 들어 황태자는 자신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으며 국왕을 대신하여 각종 행사에도 열심히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첫째 경우 푸미폰 국왕은살아 생전에 자신의 후계자는 황태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공포함으로써 그의 사후 왕권 도전의 빌미를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황태자가 왕위에 오른 후 태국입헌군주제 고유의 여러 가지 모순들(예를 들어 왕실모독법)을 제거하고 서양과같이 순수 입헌군주제를 제도화해 나간다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가 정치적 목적을 갖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어떤 한 편의 정치세력과 손을 잡는 상황이 발생하면 만성적인 정치불안과 쿠데타 발발 가능성이 있다.

둘째, 씨린턴 공주가 후계자가 되는 경우다. 앞에서 언급한 바 같이 역사적으로 왕위 계승에 힘을 발휘한 것은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 왕족과 귀족들이었다.그들은 자신들의 입지에 유리하고 선호하는 인물이 계승하기를 바랐으며 왕위계승에는 정치적 변수가 많이 작용했다.

현재 후계자 선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미칠 수 있는 집단은 추밀원이다. 추밀원은 왕실을 포함한 보수세력들의 이해를 대표하는 집단으로 여러 정황상 씨린턴 공주를 선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씨린턴 공주를 차기 국왕으로 내세우자면 후계자로 추천한 후 내각을 통해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 경우 남성만을 후계자로 인정한 1924년 왕위계승법도 추밀원 주도로 개정해야만 한다.만일 국회(하원)의 절대다수석을 황태자와 친밀한 관계를 갖는 탁씬 계 정당이차지하고 있을 경우 국회 동의를 받는일은 쉽지 않을 수 있으며 정치적 혼란과 쿠데타 발발 가능성이 있다.

추밀원의 정치적 영향력과 관련해 또 한가지 고려할 점은 추밀원 의장인 쁘렘(Prem Tinsulanonda, 1920년생)의생존과 영향력이다. 그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추밀원과 군부의 지지를 확실하게 받아 왔지만 푸미폰 국왕보다 고령이다. 그가 부재한 상황에서 왕권의 공백이 생길 경우 추밀원이 제대로 역할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2014년 쿠데타 후에는 쁘렘과 군부 갈등설, 군부와 황태자 관계 정상화설 등도 일각에서 불거지고 있다. 추밀원과현 군부 주도세력들은 반탁씬에는 의견을 같이 하지만 차기 왕권후보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황태자와 씨린턴 공주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을 고려해 둘을 배제하고 황태자의 아들이나 딸을 후계자로정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재 가장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티빵껀랏싸미촛 왕자(황태자 셋째부인 소생)와팟차라끼띠야파 공주(황태자 첫째 부인소생)이다. 이 중 티빵껀랏싸미촛 왕자를 세우되 씨리낏 왕비를 섭정으로 세우는 안이 한동안 떠오른 적이 있었지만 2012년 왕비가 뇌졸증으로 쓰러져 오른편 마비상태가 돼 그 가능성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럴수록 추밀원과 국회역할이 중요하게 될 것이다. 추밀원은왕 유고 시에 섭정의 명단을 국회에 보내 국회 승인을 받거나, 섭정이 유고상황에서는 추밀원 의장이 직접 임시로 섭정을 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귀추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끝. 2015년 9월)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