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리콴유와 싱가포르: '가족' 이라는 이름으로 ( 1 )


문 재 승 | 루트아시아편집위원

2016년 5월 12일 5:51 오후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이자 전 내각 선임장관 및 고문장관을 역임한 정치인 리콴유(李光耀 : 1923~2015)가 2015년 3월 23일 향년 9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의 사망은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를 불러왔으며 전후 동아시아 정치인에 대한 해묵은 논쟁을 다시 한 번 불러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리콴유는 총리 시절 유교적 철학에 바탕을 둔 '아시아적 권위주의'로 유명했으며, 영국 식민 지배를 받았던 싱가포르를 글로벌 무역 및 금융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독재자'와 '싱가포르를 눈부시게 발전시킨 공로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싱가포르의 발전에 끼친 그의 영향과 의미를 검토해 본다.

“나는 종종 싱가포르 국민들의 개인적인 삶에 간섭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맞습

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서있지 못할 것입니

다. (중략) 여러분의 이웃이 누구인지, 어떻게 사는지, 어떤 소리를 내고 사는지, 어떻

게 침을 뱉는지, 무슨 언어를 구사하는지 등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을 간섭하지 않았더라

면 오늘의 경제성장은 이루지 못했을 것 입니다. 뭐가 옳은지는 우리(국가)가 판단합니

다” (1986년 리콴유 총리의 독립기념일 연설 중) 1)

리콴유 당시 싱가포르 총리의 말에는 강한 확 신이 넘쳐나고 있었다. 1965년 독립한 이래 국가를 줄곧 운영해왔던 자신감에서 비롯된 표현이었겠으나, 그는 어쩌면 진실로 자신이 싱가포르의 아버지로서 (1986년 당시) 스무살이 갓 넘은 국민들을 옳은 길로 양육한다고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國父, 리콴유 (Lee Kuan Yew)

이 글은 싱가포르를 자신이 낳아 길러낸 자식이라고 여긴 아버지 리콴유에 대한 이야기다. 싱가포르가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죽어서도 벌떡 일어나 바로잡겠다2) 고 일갈했던, 무척이나 엄한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버지 리콴유는 철저한 실용주의 정치인이라고 알려졌지만, 이 글은 그를 국민들을 가족처럼 여기던 ‘가족주의’ 정치인이라고 여긴다.

정치인 리콴유의 가족주의는 그가 가진 국가관을 통해 잘 설명된다. 그는 서구와 대비되는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3) 를 지닌 싱가포르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로 ‘개인’이 아닌 ‘가족’을 꼽는다.4) 가족은 개인과 달리 구성원의 의식주를 해결해 삶을 영위해 가는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지닌

다. 따라서 개인이 아닌 가족들로 구성된 사회라면 그 사회의 주된 이슈는 구성원들의 생존에 관한 문제, 즉 의식주 해결이 우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 가족으로 구성된 싱가포르는 수많은 개별적인 가족이 모여 국가라는 대가족을 이룬 셈이고 정치지도자의 역할은 단순 히 가장(Breadwinner)의 역할로 축소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의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우선 아버지라는 타이틀에는 유효기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前 아버지’와 같은 호칭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언제든지 자녀의 삶에 등장할 수 있 다. 자녀들이 성인이 되었든 여전히 미성년이 든 간에 직접적인 개입과 간섭이 가능한 존재가 아버지다. 드러나는 개입이 아니더라도 어쩌면 아버지는 자녀들의 무의식에 남아 평생 존재감을 과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로 아버지는 자식들의 존재를 늘 상정한다. 자식들이 없으면 아버지라는 말은 지칭한 대상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아버지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늘 자식들에게 집착한다.

가족마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그 정도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집착과 접착 사이의 감정을 오간다. 한 나라의 정치 지도자와 국민들의 관계가 부모 자식간의 관계로 치환되는 순간, 아마도, 지도자가 권력에 대해 가진 집착은 국민들에 대한 애틋함으로 그려질 것이다. 또한 “다 너를 위해서”라는 설명이 따라붙는 비상식적 행위가 국민적 공감대를 통해 받아들여질 수 있다. 지도자가 선보이는 국민들에 대한 피도 눈물도 없는 조치는 엄한 아버지 상으로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한 관공서 앞에 '국부'의 죽음을 알리는 조기가 걸려있다

아버지가 되어가기 

싱가포르의 역사는 곧 리콴유의 인생이었다. 1959년 영국으로부터 자치정부를 허락받은 싱가포르에 첫 의회선거가 열렸을 때 승리한 정당은 리콴유가 주축이 된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이었으니 정치인으로 서 리콴유의 인생은 싱가포르의 역사와 함께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리콴유가 총리에 취임한 1960년대 싱가포르는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1963년 싱가포르를 포함한 영국 식민지 지역이 합쳐져 새롭게 태어난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부로 출발했으나 연방정부와 정치적인 계산이 뒤틀린 나머지, 불과 2년만인 1965년 연방에서 축출되어 싱가포르는 혼자 남겨지게 된다.5) 조그만 섬나라에 마땅한 자원도 없었고 마실 물조차도 말레이시아에 의존해야 했던 싱가포르에게 현실은 그야말로 벅찬 것이었다. 게다가 국가로서 정체성도 확실치 않은 시기에 국민들의 인종과 문화 역시 다양한 나머지 갈등의 요소6) 가 다분했다. 싱가포르에게 생존의 방법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단련시키는 한편, 실체도 불분명했던 싱가포르라는 나라에 대해 끊임없이 정의내리는 일이었다. 

따라서 아버지 리콴유의 문법은 간단했다. 위험이 판치는 정글의 맹수들이 우리를 잡아먹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신생국 싱가포르가 한가하게 ‘고담준론(高談峻論)’을논할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리콴유의 경고는 언론과 정부조직을 통해 효과적으로 국민들에게 전달되면서 무시할 수 없는 권위가 실렸고 국민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자칫 생존조차 어려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했다. 그렇게 싱가포르의 빈칸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노동권, 언론의 자유, 야당의 존재 등이 외부의 위협을 이유로 제한된 형태로 운영되는 대신, 국민들의 의식주가 확실히 보장하는 국가 싱가포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가 거친 외부 환경속에서 이러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라.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어냐고. 이들이 원하는것은 (언론의 자유 따위가 아닌) 살 집과 치료약 그리고 학교다”7)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여실히 드러낸 그의발언 속 싱가포르 국민들은 리콴유에게 그저 식구(食口)였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식구를먹여 살리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던 비장한 심정의 가장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어쨌든 아버지 리콴유가 이끄는 ‘싱가포르가족’은 성공했다. 리콴유 재임기간 동안 급성장했던 경제분야의 성취 외에도, 싱가포르인들은 점차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유엔개발계획(United Nations Development Planning)이 매년 인간의 삶의 질에 관한 지표들을 종합해 평가하는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매년 대한민국과 비슷한 수준인 30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 부의 증대에는 싱가포르 정부특유의 ‘가족주의적’ 사회 정책이 뒷받침되었다. 싱가포르 정부가 1960년 주택개발공사(Housing Development Board)를 설립하고 각종 혜택과 지원을 통해 국민들을 대상으로 자기집 갖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2014년 싱가포르인들의 주택 소유율이 90.3%에이를 정도로 국민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 주려던 정부의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또한 소위 CPF라고 불리는 중앙후생기금(Central Provident Fund)을 만들어 국민들이 벌어들이는 소득 중 일부를 강제로 저축하게 만들어 주택구입자금과 노후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왔다.8)

정부는 국민들의 의식주뿐만 아니라 배우자를 고르는 법에 대해서도 훈수를 두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1983년 독립기념일 집회 연설에서 리콴유 총리는 대졸 남성들에게 자신들만큼 우수한 아이를 원한다면 자신보다 교육수준이 낮은 아내를 고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언급하며 이른바 결혼 대논쟁 (Great Marriage Debate)을 유발했다.

리콴유는 훗날 이 발언을 두고 당시 싱가포르대졸 여성들이 2/3 가량이 미혼이라서 이들을 결혼을 시켜야 후손들이 똑똑해 질 것이라믿었기에 나온 발언이었다고 해명했다. “자신보다 교육을 덜 받은 여성과 결혼하는 대졸남성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아이들을 가질 기회를 극대화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9) 그의 이러한 믿음을 뒷받침하기 위해 1984년 싱가포르 정부는 정부부처 산하기관으로 사교개발기구(Social Development Network)를 설립해 대졸 남녀 간의 교제 활동을 돕기도 했다.

이러한 가족주의 정책과 함께 껌 판매 금지,화장실 사용 후 물 내리기를 강제하고 엘리베이터 내 소변금지 등 정부가 국민들에게 들이댄 시시콜콜한 제한들10) 은 일부 국민들의 불만은 물론, 이를 바라보는 해외 언론의 조롱을 감수해야 했다. 이른바 유모국가(Nanny State)라는 별명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리콴유는 이러한 정부의 개입이 싱가포르를 더욱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었다고 믿었다.


“만약 이런 것이 유모국가라면 나는 내가 싱가포르를 쭉 길러온 유모라는 사실을 기꺼이인정하겠다.”11)

그렇게 싱가포르를 길러온 아버지 리콴유도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1959년 영국 식민정부 아래서 자치정부 수반으로 뽑힌 이래31년간 싱가포르는 곧 리콴유였지만, 1990년정치적 동지였던 고촉통(Goh Chok Tong)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고촉통이 총리직을 수행하는 기간에도 리콴유는 선임장관(Senior Minister)으로 내각에서 활동하였으며 2004년 리콴유의 큰아들 리센룽(Lee Hsien Loong)이 고촉통에 이어 새로운 총리에 오르자 선임장관 자리에는 고촉통이 오르고 리콴유는 고문장관(Minister Mentor)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이동한다.

이후 2011년 내각에서 사퇴하기까지 리콴유는 내각의 주요 일원이자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데 무시 못 할 발언권과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12) 

쉽게 말해, 싱가포르의 아버지에서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되었던 것이다.

(계속)


각주

    1) “I am often accused of interfering
    in the private lives of
    citizens. Yes, if I did not, had I
    not done that, we wouldn’t be
    here today. And I say without
    the slightest remorse, that we
    wouldn’t be here, we would
    not have made economic progress,
    if we had not intervened
    on very personal matters - who
    your neighbour is, how you
    live, the noise you make, how
    you spit, or what language you
    use. We decide what is right.”
    2) “Even from my sickbed, even
    if you are going to lower me to
    the grave and I feel that something
    is going wrong, I will get
    up.”
    3) 리콴유는 1994년 포린 어페어
    스(Foreign Affairs) 3~4월호에
    실린 ‘문화는 숙명이다’ 는 글을 통
    해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논쟁을
    본격화 시켰다. 그가 주장했던 아
    시아적 가치의 핵심은 서구의 자
    유민주주의가 아시아의 유교문명
    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체제라는
    것이다.
    4) 리콴유는 ‘수신제가치국평천
    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싱가
    포르의 모델로 표현했다. (Foreign
    Affairs, 1994년 3-4월호,
    “Culture is Destiny – A Conversation
    with Lee Kuan
    5) 싱가포르 정부는 그 이유에 대
    해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여
    당 간에 깊은 정치적, 경제적 차
    이”가 분리를 불러왔다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양측
    의 단일시장화 문제와 싱가포르의
    특별경제구역으로서의 지위 인정
    문제가 문제되었으며 정치적으로
    는 중국계가 주축이 된 싱가포르
    의 인구구성이 말레이계가 주축
    이 된 말레이시아 연방정부에 부
    담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History
    SG, “Singapore Separates
    From Malaysia and Becomes
    Independent”)
    6) 1970년 싱가포르의 인종구
    성은 중국계 77%, 말레이계
    14.8%, 인도계 7%, 기타 1.2%
    였으며 역사상 민족 간 갈등이 표
    출된 사건은 1963년, 1969년,
    2013년 세 차례 발생한 바 있다.
    7) “You take a poll of any people.
    What is it they want? The
    right to write an editorial as
    you like? They want homes,
    medicine, jobs, schools.”